한국 민주화 역사의 커다란 분수령 중 하나인 '서울의 봄'을 다룬 영화 서울의 봄이 드디어 개봉했습니다. 네이버 영화 평점이 9점을 훌쩍 넘을 정도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요. 워낙 극적이었던 역사적 사실에 우리나라 최고의 배우들이 연기력을 발휘한 덕이 아닌가 싶습니다.
영화에서는 박정희 대통령 시해가 일어난 10.26 사건부터 1212 사태를 거쳐 5.18 광주 민주화 운동까지를 일컫는 '서울의 봄' 중 1212 사태가 발생한 당일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많이 조명받지는 못하고 있지만 1212 사태 때는 이러한 신군부의 야욕에 대항하며 끝까지 불의에 저항하고 나라에 충성하고자 했던 군부 내 인물들도 있었습니다. 영화 서울의 봄에서는 이들 진압군과 반란군 간의 대립과 충돌 과정을 극화하였는데요.
영화 서울의 봄 출연진은 전두광 역(전두환 보안사령관)으로 황정민, 이태신 역(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정우성, 정상호 역(정승화 계엄사령관) 이성민, 김준엽 역(김진기 헌병감) 김성균, 공수혁 역(정병주 특전사령관) 정만식, 노태건 역(노태우 9사단장) 박해준, 오진호 역(김오랑 소령) 정해인 등으로 매우 화려합니다.
실화 자체도 매우 극적이지만 영화에서는 강약조절을 통해 한층 더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였습니다. 이번 글을 통해 실존 인물들의 활약과 영화속 배역들의 활약을 비교해보면서 영화를 좀 더 입체적으로 재밌게 즐겨보시기 바랍니다. 다양한 예고편이 나와 있으니 미리 분위기를 만끽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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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사태 배경 상황
1979년 10.26 사건으로 오랜 기간 지속되었던 독재 정권이 무너지면서 드디어 한국에도 민주화의 가능성이 피어올랐으나 얼마 후 신군부에 의한 1212 사태로 그림자가 드리우더니, 결국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가혹한 탄압으로 잠시 찾아왔었던 서울의 봄은 다시 사라지게 되었죠.
이렇듯 서울의 봄에서 1212 사태는 커다란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신군부가 사실상 권력을 장악하면서 다시 한번 군사 독재가 이어지는 발판을 마련한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1212 사태의 가장 큰 배경은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였습니다. 1979년 10월 26일에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면서 전국에는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이 되었습니다. 최규하 국무총리는 헌법에 따라 대통령 권한 대행이 되었죠.
당시 육군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 소장은 10.26 사건 수사를 담당하는 합동수사본부장이 됩니다. 이때 전두환은 육사 11기를 중심으로 한 군내 비밀사조직 하나회를 결성해 놓고 있었는데요. 군대 내 사조직은 말이 안 되는 것이죠. 결국 이것이 문제가 됩니다.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계엄을 끝내고 권력을 민간에 이양함과 동시에 인사개편을 통해 하나회를 해체시키려는 의사를 나타냈습니다. 그 일환으로 서울을 지키는 수도경비사령관에 부대 최초로 육사 출신이 아닌 장태완 장군을 임명하기도 하였죠.
전두환을 비롯한 하나회는 당연히 이에 반감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결국 전두환은 자신이 권력을 잡기로 결심하고 정승화 장군을 끌어내리는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마침 수사의 전권을 지닌 합동수사본부장이었기 때문에 명분도 어떻게든 만들어낼 수 있었죠. 곧 계획 실행일이 12월 12일로 정해집니다.
1212 사태의 전개
1212 사태는 저녁부터 빠르게 전개되었습니다. 반란군은 군권 장악의 걸림돌이었던 계엄사령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10.26 사건에 연루시켜 체포하는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작전일은 12월 12일이었고, 작전명은 '생일집 잔치'였습니다.
이때 반란 작전에 동조하는 지휘관들(수도군단장 차규헌, 1군단장 황영시,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 9사단장 노태우, 20사단장 박준병, 1공수여단장 박희도, 3공수여단장 최세창, 5공수여단장 장기오, 30경비단장 장세동, 33경비단장 김진영)은 경복궁 내에 위치해 있던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장실에 집결하여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하나회에 속하지 않은 지휘관들이었는데요. 전두환은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특전사령관 정병주, 육군 헌병감 김진기 등 수도권 소재 부대의 지휘관들을 연희동 만찬에 초대하였습니다.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는 동안 이들의 발을 묶어 두려는 계획이었죠.
다만 계엄사령관의 체포에는 대통령의 재가가 필요했습니다. 전두환은 체포에 대한 재가를 받기 위해 최규하 대통령을 찾아갔으나 재가를 받지 못합니다. 국방부 장관이 동석하지 않는 한 재가를 할 수 없다는 이유였는데요.
그런데 육사 3기로 전두환보다 8기수나 선배였던 노재현 국방부 장관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참모총장 공관에서 총소리가 난 이후에도 군의 책임자로서 이를 해결하러 나서지 않았죠.나중에 숨어있던 곳에서 발각된 후에는 반란군 측에 협조합니다.
반란군은 일단 체포부터 한 후 사후 재가를 받기로 하고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으로 향합니다. 당연히 정승화 총장은 불법 체포에 대항하였고, 반란군과 공관 경비병들 사이 총격전이 벌어진 끝에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납치되었습니다. 총장의 납치 소식에 육군 본부는 수도권 전 부대에 비상경보인 진돗개 하나를 발령합니다.
반란군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및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회유하려 하나 실패합니다. 오히려 장태완 장군은 신군부 세력을 반란군으로 설정하고 바로 진압에 나서죠. 당시 수도경비사령부는 현재의 남태령이 아닌 남산에 있었는데 부대를 동원하여 경복궁 30경비단으로 출동하려 했습니다.
당시 장태완 장군이 3군 사령관에게 상황 보고를 하는 통화 내용이 기록에 남아 있는데요. 반란군 측의 회유 시도를 일축하면서 반란군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정병주 특전사령관도 특전사에 출동명령을 내리나 예하 부대 중 수도권에 위치한 1, 3, 5공수여단이 이미 모두 반란군 측에 가담한 상태였습니다. 결국 인천 부평에 위치하고 있던 윤흥기 준장의 9공수여단만이 서울로 출동하게 됩니다.
이때 반란군이 이대로 가면 내전이 우려된다며 자신들도 김포에서 출동한 1공수여단을 철수시킬 테니 9공수여단을 철수시키라는 거짓 신사협정을 제안합니다. 이에 육군참모차장을 비롯한 진압군 측이 상황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9공수여단을 철수시켰으나 1공수여단은 그대로 서울로 들어옵니다.
승기를 잡은 반란군 세력은 서울의 3공수여단을 출동시켜 정병주 특전사령관 체포에 나섭니다.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자신의 후배들을 자식처럼 아끼고 챙기기로 유명했었는데요. 가장 가까웠고 믿었지만 개인의 영달에 눈이 멀어 은혜를 저버린 부하들에게 발등을 찍히게 됩니다.
이때 홀로 남아 사령관을 지키던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은 반란군의 총탄에 6발을 맞아 전사했고 정병주 장군도 팔에 총상을 입은 채 체포되었습니다. 사령관 체포는 반란군 박종규 중령이 이끌었는데, 김오랑 소령의 육사 2년 선배로 이웃집에 살며 형제와 같이 지내던 사이였습니다.
박종규는 진입 전 전화를 걸어 김오랑 소령을 회유하려 했으나 군에 대한 소신과 특전사로서의 임무 의식이 뚜렷했던 김오랑 소령은 이를 단호히 거부하였습니다. 오히려 사령관실의 당번병 등 비전투요원들을 모두 철수시킨 후 사령관실 문을 잠근채 홀로 항전하다 총탄에 맞게 되었습니다.
결국 반란군이 용산의 국방부와 육군 본부, 특수전사령부까지 모두 장악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지막까지 항전하던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은 더 이상 아군끼리의 교전은 의미 없다고 판단해 진압을 포기하게 됩니다. 이에 반란군의 승리로 1212 사태는 마무리됩니다.
1212 사태 관련 인물들
전두환 등 반란군 세력이 오랜 기간 권력을 쟁취하고 영달을 취했지만 역사는 이들을 죄인과 배신자로 남기고 있습니다. 반면 끝까지 자신의 신념과 정의를 위해 불의에 맞섰던 장태완 장군, 정병주 장군, 그리고 김오랑 소령 등은 참군인으로 역사에 기록되었죠.
전두환, 노태우 등 반란군 세력은 이후 정권을 잡고 20년 가까이 권력을 유지했습니다. 이들에 합세했던 자들 역시 그러한 권력 밑에서 영달을 누릴 수 있었죠. 이들에 대한 단죄는 1993년에 문민정부가 들어선 후에야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1996년 서울중앙지법의 1심 재판부는 1212 사태를 군사 쿠데타로 정의하고 반란죄 및 내란죄의 명목으로 전두환에게 사형, 노태우에게는 22년형 및 각각 2천억 원이 넘는 추징금을 선고하였습니다. 이후 항소심에서 전두환은 무기징역, 노태우는 17년 형으로 감경되었죠.
반면 정의의 편에 섰던 분들은 그 권력 아래서 온갖 고난을 겪었습니다. 보안사로 끌려가 고문을 당한 후 강제 예편 당해 군에서 쫓겨나는 것은 물론이고 대부분 가족들이 풍비박산 나기도 하였습니다.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은 강제 예편당했으며, 장태완 장군의 아버지는 충신이 역적으로 몰린 상황을 한탄하다 이듬해 돌아가셨고, 서울대생이었던 아들은 행방불명된 후 변사체로 발견되었는데 의문을 남긴 채 자살로 처리되었습니다.
정병주 특전사령관도 보안사에 끌려가 각종 고문을 당한 후 강제 예편당했습니다. 그는 그 후 10년 간 1212 사태를 하극상이자 반란으로 규정하고 이의 부당성을 지속적으로 주장했는데요. 1989년 갑자기 실종된 지 4달여 만에 야산에서 목맨 체로 발견되어 자살로 처리되었으나 타살에 대한 의혹이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김오랑 소령은 뒷산에 암매장되었다가 3개월 후 국립 서울 현충원으로 이장됩니다. 10년 후 중령으로 추서됐고, 2022년이 되어서야 순직이 아닌 전사로 판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시력 장애의 지병을 앓고 있던 그의 아내는 충격으로 아예 실명하게 되었고 몇 년 후 실족사하게 됩니다.
고작 자신의 안위와 출세 등 개인의 영달을 위해 자신을 믿어줬던 소중한 동료와 선후배, 더 나아가 국가에 대한 배신도 불사하는 자들의 추악한 모습은 역사에서 되풀이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지금 오늘날에도 이런 일들이 여전히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면 참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하는데요.
최악의 상황에서도 지조와 신념, 의리 등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흔들리지 않고 상황에 대처한 분들을 우리가 더 많이 얘기하고 기억해야 후세들이 본받을만한 좋은 귀감이 바로 서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영화 「서울의 봄」은 이분들이 재조명된다는 측면만으로도 큰 의미를 갖는 작품이 아닐까 싶네요. 이상 1212 사태에 대한 글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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